[아이 낳기가 겁난다] [上] 한밤의 분만실 전문의(醫)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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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1.23 03:10
산부인과 전문의 배출5년새 절반으로 줄어
전국 103개 종합병원 중당직 의사 상주 33곳 뿐
야간 당직 설 남자 전문의,1년에 10여명 밖에 배출 안돼
"돈 못벌고 비전 없다" 들어온 전공의도 중도 포기
#1. 서울 인근 인구 20만명의 K시(市). 이 도시의 유일한 A대학병원 산부인과로 21일 밤 10시에 취재진이 전화를 걸었다. "32주 된 산모가 심한 진통을 느끼는데 지금 가도 되나요?"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저희는 분만 안 받습니다. 오셔도 소용없어요."명색이 500병상 규모의 대학병원인데, 야간 당직을 설 산부인과 레지던트(전공의)가 한 명도 없어서 야간 분만실을 폐쇄한 지 1년도 넘었다는 것이다. 이 도시에서 아이를 낳으려는 산모는 진통을 참으며 10㎞ 이상 떨어진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전체 출산의 50%는 야간에 이뤄지지만, K시에서 '밤의 출산 인프라'는 무너지고 있었다.
#2. 지난 16일 밤 9시, 서울 강북의 B대학병원 분만실. 산모 곁을 지키는 의료진은 조산사 한 명과 간호사 두 명뿐이다. 산부인과 의사는 없다. 태아의 움직임과 출산 진행 상황을 체크하는 것은 전적으로 조산사 몫이다. 이 병원 소속 산부인과 레지던트가 한 명뿐이다 보니, 이처럼 야간 당직 의사가 없는 날이 수시로 생긴다.
분만이 임박한 시간이 되면 그제야 나이 지긋한 산부인과 교수가 부랴부랴 병원에 나온다. 그전에 갑자기 태아와 산모에 응급 사태가 생겨도 전문적인 의학 판단을 할 수 없다. 낮에 수술과 진료를 하는 4~5명의 교수가 교대로 콜 당직(전화로 호출하면 병원에 나오는 것)을 서면서, 야간 분만실을 겨우 꾸려가고 있다.
저(低)출산을 극복하자며 온 나라가 시끄럽지만, 정작 국가 미래가 걸린 '출산 인프라'는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 산부인과 의사 없는 1970년대식의 '조산사 분만' 시대가 다시 오고, 야간에 의료 공백이 나타나고 있어 아기 낳기가 불안한 상황이다.
남녀평등 시대에 남자 산부인과 의사 부족이 문제 되는 것은 여의사 대부분이 야간 당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부인과학회 김상운(세브란스병원) 사무총장은 "여성이 육아와 가정을 책임지는 사회 분위기 탓에 여성 산부인과 의사들은 야간 분만 의사 생활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강남성심병원 이근영(산부인과) 원장은 "산부인과 의사 중에서도 임신과 분만을 전문 분야로 삼으려는 의사는 대한민국 전체에서 한 해 10명도 채 안 된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 여성의 첫 자녀 출산 연령은 평균 30세다. 10년 사이 약 4년이 늦어졌다. 이들 고령 산모는 원만한 임신 유지와 분만을 위해 고도의 의료적 처치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정작 산부인과 의사들은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조사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전국 103개 종합병원 중 25곳(대학병원 7곳 포함)은 야간에 아예 산부인과 의사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사 대신 조산사·간호사가 분만실을 지킨다. 산부인과 의사가 상주하는 곳은 33개 병원뿐이다.
산부인과학회 박용원(연세대 의대 교수) 이사장은 "출산 연령이 늦어지면서 당뇨병이나 갑상선질환, 인공수정을 통한 쌍둥이 임신 등 고(高)위험 임신이 전체의 20~30%를 차지한다"며 "고도의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산모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분만 의료 수준은 되레 낮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 ▲ “응애~.”서울 제일병원에서 갓 태어난 신생아가 분만실의 긴장을 가르고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부모는 생명의 신비에 감격하지만, 대한민국의‘출산 인프라’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제일병원 제공
야간 분만 시스템이 허술하기는 동네 산부인과 병원도 마찬가지다. 이비인후과 의사 최모(36)씨는 얼마 전 둘째아이 출산에 동행하면서 겪은 황당한 경험을 취재진에게 털어놨다. 지난달 29일 밤 9시 무렵 진통이 시작되자, 최씨 부부는 평소 부인이 다니던 동네 병원 분만실을 찾았다.
하지만 2시간이 지나 자정이 다 돼서야 당직 의사가 헐레벌떡 뛰어 왔다. 그는 군의관 복무 대신 경기도 지역 보건소에 근무하는 공중 보건의사였다. 야간 당직 산부인과 의사가 부족하자 병원이 공중보건의사를 '편법 아르바이트'로 채용한 것이다.
이 병원에는 마취과 의사도 상주하지 않고 있었다. 최씨는 "만에 하나 분만 과정에서 태아에 문제가 생겨 급히 제왕절개를 해야 하거나, 자궁 과다 출혈로 응급 수술이라도 할 상황이 생겼으면 어쩔 뻔했는지 지금도 아찔하다"고 말했다.
산부인과 야간 당직 의사가 부족한 것은 젊은 의사들이 갈수록 산부인과 전공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근무 여건이 가장 취약한 야간 분만 당직에서 제일 먼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전국 종합병원의 산부인과 레지던트(전공의) 확보율은 정원의 53%로, 필요 인원의 절반만 채워지고 있다. 그나마 절반은 서울의 주요 대형병원에 집중돼, 지방은 더욱 심각한 의료인력 공백 상태다. 경기도와 인천 지역 병원의 확보율은 33%, 그 외 지방은 43%에 불과하다.
그나마 산부인과 의사를 하겠다고 들어온 의사들도 매년 약 10%는 중도에 그만두고 다른 전공으로 전과(轉科)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처음 산부인과 전공의 생활을 시작한 의사 142명 중 20명은 1년도 못 돼 병원 생활을 접었다.
한 해 배출되던 산부인과 전문의 수는 2004년 258명에서 2009년 138명으로, 5년 사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올해는 약 100명, 내년에는 80여명만 배출될 예상이다. 이런 추세라면 10년 후엔 야간 분만 담당 의사가 없어 '출산 대란'이 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젊은 산부인과 의사가 부족하자, 병원들은 산부인과 교수와 조산사·간호사 등을 투입해 그 업무를 간신히 메워가고 있다. 강원도 춘천 한림대 병원도 교수들이 야간 분만을 교대로 맡고 있다. 산부인과 노의선(55) 교수는 "조금 있으면 은퇴를 준비해야 할 나이인데 낮에는 수술하랴 밤에는 당직하랴 일이 버겁다"고 말했다.
1980~1990년대 들어 모든 분만이 조산소 대신 병원에서 이뤄지면서 사라져 가던 조산사는 현재 17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대한조산협회). 그중 1200여명은 산후조리원이나 개인 의원이 아닌,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 근무하면서 의사 역할을 대신하거나 분만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조산사 김모씨는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3~4명의 산모가 한꺼번에 올 때는 사고가 날까 봐 우리도 불안하다"며 "동네 산부인과에서 자연분만하다 문제가 생긴 산모들이 밤에 들이닥칠 때는 참 난감하다"고 말했다. 정상적인 자연분만은 조산사가 처리할 수 있으나, 난산이나 태아 이상 발생 등 분·초를 다투는 응급 상황에서는 전문의료적 대처가 늦을 수밖에 없다.
서울 중구 묵정동의 제일병원은 한 해 700~800명의 신생아가 탄생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분만이 활발한 병원이다. 이곳 분만실과 병동을 지키는 산부인과 의사는 거의 다 여자다. 21명의 산부인과 레지던트 중 남자는 딱 2명이다.
이처럼 남자 의사들이 산부인과 전공을 기피하는 분위기도 야간 분만 의사 부족을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전국 병원의 산부인과 레지던트 414명 중 남자는 62명(15%)으로, 7명 중 1명꼴이다. 남자 산부인과 전문의는 일 년에 10여명밖에 배출되지 않고 있다. 의료계에서는 "시·도에 한 명꼴"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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