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30년, 롯데 30년 부산의 거인, 그들을 만난다] <9> 156㎞ 강속구 투수 박동희 | |
'슈퍼 베이비' 박동희가 지난 1990년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작은 사진은 2007년 4월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열린 박동희 추모식 도중 전광판에 뜬 추도사. 부산일보 DB |
박동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07년 3월 22일 오전.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팬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슈퍼 베이비'로 불리며 부산 갈매기 야구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박동희가 숨졌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 세상을 버리기 아까운 나이였지만 그는 무엇이 그리 급했던지 시속 150㎞를 넘는 강속구만큼이나 빨리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박동희는 최동원의 대를 잇는 부산야구의 강속구 투수였다. 대연초등-초량중(현재 부산중)-부산고를 졸업한 뒤 1990년 계약금 1억 5천200만 원을 받고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최동원 대 이을 투수로 각광
2007년 39세로 교통사고사
92년 KS MVP 최고 황금기
그는 롯데에 오지 못하고 삼성 라이온즈 선수가 될 뻔했다. 롯데 2군 김태민 매니저의 회고다. '박동희가 중 3 때 당시 포철공고 유태중 감독이 스카우트의 손길을 뻗쳤다. 포철공고 야구부를 지원하던 포항제철이 박동희를 잡으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포항제철 사람들이 움직였다. 박동희 부친을 만나 백지수표를 전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강직한 분이었다. '아들은 부산고에 보낼 겁니다.'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정리됐다. 또 부산고와 부산중 감독들이 모여 의논을 했다. 다치지도 않은 박동희의 왼팔에 깁스를 하게 했다. 포철공고가 포기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그는 부산고에 진학했고 결국 대학을 거쳐 롯데에 올 수 있었다.
박동희는 고려대 재학 시절이었던 1988년 서울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선발돼 일본의 노모 히데오와 맞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4승을 따내 최다승투수가 됐고, 1989년 대륙간컵에서는 최우수우완투수로 선정됐다. 아마 시절 연습경기에서 직구 시속 156㎞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화려한 아마 성적 덕분에 '최동원의 뒤를 이을 롯데 야구의 희망'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롯데 입단 과정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계약금 액수를 둘러싸고 구단과 이견이 컸기 때문이었다. 박동희는 신문사 스포츠기자였던 친척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2억 원을 요구했고, 구단은 1억 3천만 원을 제시했다. 전지훈련 직전까지도 계약을 하지 못했다.
박동희가 계약서에 서명하게 된 것은 당시 안상영 부산시장이 나선 덕이었다. 안 시장은 박동희 사태가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자 박동희와 당시 민제영 롯데 사장을 시청으로 불러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라고 권했다. 마침내 양측은 2월 3일 계약을 완료했다.
당시 롯데 투수코치는 장명부 씨였다. 그는 "입단을 한두 달만 빨리 했어도 내가 가진 경험과 구질을 가르쳐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었다. 직구 구위만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며 아쉬워했다. 만약 그가 장 씨의 솜씨를 전수받았더라면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입단 첫해 그는 비교적 좋은 성적으로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1990년 4월 11월 대구에서 열린 삼성과의 데뷔전. 그는 홈런 1방을 맞기는 했지만 6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다. 직구 최고구속 151㎞를 기록해 한국야구 사상 공식전 최고 구속 신기록을 세웠다. 당시 포수였던 한문연(현재 SK 와이번스 2군 코치) 전 롯데 코치는 신인 시절 박동희의 구질에 대해 "공이 묵직했다. 돌팔매질을 하듯 빠르고 무거웠다"고 말했다. 그해 박동희의 성적은 10승7패7세이브였다. 1991년에는 14승9패를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팀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기며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그러나 박동희는 이후 팔꿈치, 허리 부상 등이 겹치면서 제대로 출장하지 못했고, 성적도 내지 못했다. 특히 1996년부터는 코칭스태프와 갈등을 빚었고, 이듬해에는 통풍성 관절염까지 얻었다. 결국 그는 그해 김종훈과 함께 삼성의 이동수-박석진과 2 대 2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그는 삼성에서도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2002년 은퇴했다. 그가 프로선수 생활 12년 동안 남긴 성적은 59승50패58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92.
박동희는 은퇴 이후에는 서울 소재 한 건설업체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결국 팬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혔다.
박동희를 프로에서 만난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프로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시든 것은 부상 외에도 술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소에는 조용하면서도 동료들과 잘 지냈지만 술을 한 번 마시면 폭음을 했다고 한다. 언제부터 술을 마셨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선수들과 코치진 사이에 설명이 다르다. 선수들은 입단 초기부터라고 말하고, 코치들은 트레이드되고 난 뒤에 보니 술을 마시더라고 설명했다. 박동희보다 입단 1년 선배인 상동야구장 윤동배 소장은 "공은 정말 좋았다. 자신을 제대로 관리했으면 선동열에 버금가는 대단한 투수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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