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古시대 가장 문명 발달했었던 東夷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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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내는 讀過分, ( >내는 방향이 한정된 수식구, “:”는 등호, 또는 격리자, “-”는 장음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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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생활양상을 잘 들여다보면 현실적으로는 최근까지 문화라는 것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영국에서 200년 전 귀족들의 생활양상을 보면 그들이 'Cutlery'라고 부르는 식사도구도 변변한 것이 없고, 식탁에는 토끼 등 'Prey:먹을거리'를 구어서 그것을 잡아온 남자가 '우아하지도 못 한' 칼을 갖고 마음대로 쓱 쓱 썰어가며 나눠주면 가족들은 "without asking neither salt, nor pepper" 즉 허겁지겁 먹는 상황이었다.
T.S. Eliot의 "Murder in the Cathedral"라는 연극에서는 그 당시 (AD 1100년 대) 영국 황실에서도 식사 때 나이프나, 포우크 等도 없는 속에, 외국소식이라고 "이태리 궁중에서는 식사 때 fork(4枝槍 같은 농기구)를 쓴다며?"하고 웃음거리를 만드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중국서북 쪽 사막에 살 때부터 식량부족, 카롤리- 부족을 '더운 국'으로 해결해온 긴 역사를 갖고 있어서, 국물을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숫가락을 써왔기 때문에, 이로해서 新羅시대의 '柳葉匙/유엽시'가 이미 발달되어 (중앙 박물관에 전시) 그 아름다운 曲線/곡선은 우리가 어마나 일찍부터 食도구 문화를 즐겨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오늘의 화두는 당시 동식물성 먹이가 많이 않는 속에서 사람들이 ‘수집과 사냥’ 행위를 하루 종일 하고 아침에 療飢/요기(시장끼 치료)를 하고 떠나, 점심도 줄여먹으면서 山野(고비)를 뛰어다니면서 ‘먹을 거리’를 收集해서, 저녁 때 함께 모아 끓여 먹곤 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굶어죽는 일이 없는 생활형태였다는 것이다.
함께 저녁을 먹은 나머지 시간은 춤추고 노래하며 즐겼기 때문에, 어른들 중심으로 술마시며 원한이 길어지기 전에 서로 和解도 하고, 항상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후대 교육도 했던 것이다. 출산도 마을의 경사였으며 머리 큰 아이를 선호하고(서구에서는 분만은 남 없는 곳에서 몰래하곤 했고 머리 큰 출생아를 특별히 선호하는 경향은 없었다), 머리 좋으라고 ‘이오드’ 성분을 산모에게 투입했다. 이 ‘이오드’는 물고기 등에 주로 포함되어 있어서 그 후에 한반도에 정착했을 때에는 ‘미역’의 형태로 ‘이오드’를 공급했는 데 이 ‘이오드’가 충분히 투입되어야 아이들의 머리가 좋다. 산모에게 미역을 먹이는 지혜 역시 상술 ‘정보교환’ 및 ‘교육’의 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渤海/발해에서 만주 일대에 펴저 살았던 우리 ‘倍達/배달’의 겨레는 농업시대 이전에는 주로 토기와 쥐, 그리고 뱀 사냥(上古 네안데르타-ㄹ 時代에는 맘모드), 그리고 먹을 수 있는 잡목 목피, 그리고 새 순 등이었는데 (救荒用으로 檀君이 심게 한 무궁화나무가 만주 전체에 깔려 있어서 ‘槿域’이라고 물렀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칼로리- 부족을 ‘더운 국물’의 열 카롤리-로서 보충하는 생활 형태였기 때문에 식은 음식을 ‘더운 국물’에 말아 먹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국그릇을 ‘먹는 이’ 앞 중앙에 두고, 식은 밥(우리 食餌역사 중 가장 늦은 조선조 때까지도 主穀은 ‘기장/稷’이라는 粟/속:millet 종류였다)은 그 왼쪽에 두었던 것이다.
한 편 프랑스 南部 까마르그:Camargue에 있는 ‘쌀 연구소’에서의 발표로는 “쌀은 그 한종류만 계속 섭취하고 살아도 營養 不균형이 일어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먹을 꺼리’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쌀은 가장 ’영양 발란스‘가 잘 잡힌 食餌/식이라는 뜻이다. 상고사 때 있었던 ’쌀‘이란 ’陸稻/육도‘로서 ’米(미)‘가 아니고 ’禾(화)‘로 표시된다. 왕권시대부터 써왔던 ’租稅‘라는 말의 ’租(조)‘는 ”쌓은다, 빌린다“라는 뜻까지 밖에 안 나와 있으나 이 글자 옆에 ’禾‘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右便에 차곡차곡 싸아놓은 글자형상(且)으로 봐서 일찍부터 ’禾‘가 몹시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지구를 남북으로 갈라 우리는 ‘北麥 南禾(米)’로 생각하기 쉬우나 잘 조사해보면 쌀이 길러졌던 곳은 東夷族의 영향권임이 점점 드러나고 있어서 (상기 까마르그 의 쌀 歷史는 200년 이하)사실은 동이족을 쌀의 생육조건을 맞출 줄 알아서 상당한 高緯度의 지방까지도 ‘쌀’을 경작할 줄(최근까지 만주의 漢族 들은 그 지역에서 ‘米作’을하는 동이족의 재주를 부러워만 했는데, 최근에 벼農地를 팔고 美國 등으로 이민 가는 朝鮮族 들이 생겨서 만주 漢族들에게 기회가 돌아오고 있다) 아는 반면 지금 緯度로 봐서 월등이 南方인 지중해의 시실리- 등은 로-마人의 主穀인 ‘小麥/소맥:밀’을 로-마 時代부터 공급하고 있다.
결국 ‘北麥 南禾(米)’가 아니라 원시기술로 남은 곳은 ‘보리/밀’이고 東夷文化만이 ‘禾, 稻’로서 ‘米(쌀:이팝)의 문명을 즐기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동이족은 太古쩍부터 '영양 調整穀:Nutrition Balancer'으로의 ‘禾’와 ‘米’의 가치를 알고 있어서 평상시 ‘쌀‘을 주식으로 먹지는 못하는 경우도 ’夜盲症:Vitamin A 결핍‘ 등 질벼의 치료제로 애용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치료기능 식품의 존재는 동이족이 머리도 좋았지만 主로 상술 “항상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후대 교육도 했던” 우리 민족의 지혜의 누적(Corporate Memory) 덕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워낙 민족準位(레밸)로 지혜를 누적시켜 왔고 ‘네안데르타-ㄹ’系가 많아서 어느 민족보다도 기억력(따라서 ‘恨’도)이 강해서 일찍부터 靑丘(Blue Mountain Region)의 늙은 땅<중국에는 산이 없다) 을 찾이하고 지금까지 지진의 害(해)도 가장 적은 곳에 정착해서 일찍부터 농경문화를 꽃 피우고 있었던 것도 그 민족경험(Corporate Memory)에서 올 것으로 추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이족은 ‘신생아의 큰 머리 선호’ 경향, 그리고 미역국 등으로 꾸준한 ‘이오드’성분 공급 등으로 고도 문활ㄹ 개발할 객관적 자격도 있지만 ‘네안데르타-ㄹ’系의 큰 머리의 長技/장기인 長期記憶으로 해서도 가장 살기에 적합한 땅을 후손에게 물려 줄 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쌀이 동이족의 ‘벼 나무(풀) 비위 맞추기’ 민감성이 가져다 준 東夷族 재주의 산물이였다고 하면 그 다음 지적할 것이 콩의 경우이다. 필자는 항상 역시 ‘영양발란스’용으로 ‘매주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東夷族의 智慧’의 산물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는데 日帝時代에 그것이 不可缺한 營養素였기 때문에 刑務所에서도 ‘콩밥’을 먹였는데 “그토록 중요한 농작물이라면 ‘긴 민족 경험’을 누적시켜온 동이족의개입이 없었을 수가 없다”는 것이 필자의 論據/논거인 것이다. 우리는 정치적인 이유로 광복후 60년을 일베의 나쁜 점 열거를 위해서 세월을 사아 오렸지만, 그들은 전쟁 도중에 어려운 식량사정 해결을 위해서(우리 들의 유일한 통념은 이본논들이 한반도의 좋은 쌀을 다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戰爭이라는 어려운 時期에도, 귀중한 鐵道수송력 동원해서 만주에서 (기름 짜고 남은) 豆粕(콩기름 짜고 남은 지게미)을 가져다 공급했는데, 아마도 다른 어느 민족(우리 자신을 포함)도 전쟁도중에 그러한 배려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죄수 들에게도 먹였던 營養補充材/영양보충재 大豆가 우리 동이족에 의해서 개발 됐을 것이라는 論據가 될만한 자료가 문화일보에 나와(2007-9-1 吳창규부장) 있어서 이곳에 올기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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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두만강 문화일보 2007-9-1
吳창규 전국부장 chang@munhwa.com
1930년 어느 날. 豆滿江 沿岸의 모 旅館에서 한 젊은 女人이 밤새도록 흐느껴 울고 있었다. 옆방에 묵었던 流浪劇團의 한 團員은 잠을 설쳤다. 다음날 아침 그는 그녀에게 自初至終을 물었다. 事緣인즉 男便이 抗日鬪爭을 하다가 日本軍에 잡혀 갔다는 消息을 듣고 豆滿江을 넘어와 보니 이미 남편은 銃殺當한 뒤였다고 했다.
流浪劇團 “예원좌”의 團員은 李시우라는 사람이다. 그는 女人의 哀切한 事緣을 五線紙에 담았다. 그리고 后에 韓명천 作詞, 金용호 改作을 거쳐, 歌手 金정구에 依해 마침내 國民歌謠格인 “눈물 젖은 豆滿江”이 만들어졌다. 두만강(豆滿江)은 콩이 가득 찬 江이라는 뜻이다. 콩을 이고 건너다 미끄러져 콩이 江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일이 많이 發生해 붙여진 이름이다. 日帝때도 數많은 사람들이 間島를 開發하면서 콩을 이고 이 江을 건넜다.
콩의 原産地는 滿洲와 韓半島다. 滿洲는 勿論 韓半島에 散在해 있는 新石器 靑銅器 遺蹟地에서는 炭化된 콩이 자주 發見되고 있다. 紀元前 600年, 薺나라 宰相이었던 管仲은 “산융(山戎 東夷族의 한 갈래)으로부터 숙(菽·콩)을 가져와 온 世上에 퍼뜨렸다”고 記錄했다. 中國 古代의 經濟學書인 ‘관자’에도 “齊 나라 桓公이 滿洲地方에서 콩을 가져와 中國 全域에 普及했다”고 적혀 있다.
1세기 무렵에 쓴 中國 사기(史記)에는 “시(豉)는 外國産이기 때문에 아무나 손쉽게 만들 수 없다”고 했다.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도 ‘高句麗 선장양(善藏釀)’이라는 句節이 있다. 이는 ‘高句麗 사람들은 醱酵飮食, 卽 술과 醬을 잘 담근다’는 뜻이다. 新羅 逸聖王 때(139년) ‘서리가 내려 콩 農事를 亡쳤다’는 記錄도 있다.
淸國醬을 淸나라 飮食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三國遺事에 新羅의 幣帛品目인 豉(메주)가 있고, 15世紀에 지어진 골계서(滑稽書)에 법시(法시)라는 말이 있으며, 1527年에 發刊된 訓蒙字會에는 푸른 곰팡이를 띄워서 만든 醬, 卽 청국장(淸麴醬)이라는 單語가 있다. 淸나라는 1636年에야 建國된 나라다.
우리 말과 風習에는 콩과 關聯된 것이 많다. 된장, 간장, 豆腐, 淸麴醬, 콩나물, 고추장 等은 콩으로 만든 代表的인 食品이다. 醬을 담가먹는 항아리를 안고 사는 民族은 우리뿐이다. 立春날 콩으로 鬼神 쫓는 風習도 있다. 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안 믿는다’는 俗談이나 ‘숙맥’이라는 故事成語도 興味롭다. 特히 숙맥은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나온 말로 콩인지 보리인지 가릴 줄 모른다는 뜻이다.
最近 콩硏究家 유미경씨가 쓴 ‘우리콩 世界로 나아가다’라는 책에 따르면 콩이 西洋에 傳來된 것은 1739年 프랑스 파리植物園이 처음이라고 한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自敍傳에 依하면 1770年 英國에서 그의 故鄕인 필라델피아에 콩씨를 보냈다고 한다. 美國은 1901年부터 1976年까지 우리나라에서 5496種의 在來種 콩을 蒐集해갔다. 이 같은 事實은 高麗大出版部의 ‘콩 大豆 soybean’이 밝히고 있다. 美 農務部는 1947年까지 1萬個의 遺傳子型을 우리나라에서 蒐集해 갔다.
이달 初 白頭山을 거쳐 豆滿江을 다녀왔다. 선양에서도 옌지에서도 滿洲의 끝없는 平野는 大多數 콩밭으로 덮여 있었다. 콩밭 길을 따라 到着한 豆滿江은 그 넓은 滿洲가 古朝鮮과 高句麗, 渤海, 朝鮮, 日帝를 거쳐 中國으로 넘어가는 동안 흘린 數많은 눈물을 머금고 덧없이 東海로 흘러가고 있었다. 江 건너 가난에 찌든 北韓 사람들의 눈빛을 보면서 ‘눈물 젖은 豆滿江‘을 불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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