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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물 어는 온도는 0도 아닌 -48도

물은 섭씨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 초등학생들까지 알고 있는 과학의 기본법칙이다. 물의 어는점과 끓는점을 기준으로 온도계를 만든 것이 섭씨 온도계다. 18세기 스웨덴 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Anders Celsius)가 만들어 한자로 섭씨(攝氏)라 표기한다.

▲ 섭씨 영하 48도에서도 얼지 않고 액체로 존재하는 '과냉각수'의 원리가 최근 밝혀졌다.  ⓒImage Today
그런데 0도보다 낮은 온도에서도 얼지 않는 물이 있다. 소금기가 포함되면 순수한 상태보다 어는점이 내려가는 빙점강하(freezing point depression) 현상이 일어난다. 영하의 날씨에도 바닷물이 얼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순수한 물인데도 영하 몇십도의 추위에 얼지 않는 경우가 있다. 대기권에서는 영하 40도에서도 물 성분이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이처럼 액체가 어는점 이하에서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는 현상을 ‘과냉각(supercooling)’이라 한다.

최근 미국 유타대 화학과 연구진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섭씨 영하 48도에서도 물이 얼지 않는 현상을 설명해냈다. 연구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 최근호에 ‘과냉각수의 구조 변형(Structural transformation in supercooled water)’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수소결합’ 때문에 얼음 밀도가 물보다 낮아

대표적인 액체를 꼽으라면 대부분 ‘물’을 선택한다. 그러나 물은 일반적인 액체와 다른 성질을 보인다. 예를 들어 고체는 밀도가 높아서 액체에 넣었을 때 바닥으로 가라앉지만 얼음은 오히려 물 위에 뜬다. 물이 얼면 오히려 밀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물의 밀도는 섭씨 4도에서 가장 높다. 온도가 낮아져 물이 얼기 시작하면 밀도가 작은 얼음은 위로 떠오르고 상대적으로 따뜻한 물은 밀도가 높아 아래로 내려간다. 덕분에 강과 연못에 사는 생물들은 겨울이 와도 무사히 지낼 수 있다.

밀도는 부피와 연관이 있다. 밀도가 높아지려면 부피가 작아져야 하고 밀도가 낮아지면 부피가 커진다. 얼음은 밀도가 낮으므로 유리병에 물을 담아 얼리면 부피가 커지면서 병이 깨진다.

▲ 한겨울에도 물고기들이 얼어죽지 않는 이유는 얼음의 밀도가 물보다 낮아 위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Image Today
일반적으로 액체가 고체로 변하면 부피가 줄어들면서 밀도가 높아지지만 물은 그 반대다. 비밀은 ‘수소결합(hydrogen bonding)’에 있다. 물 분자는 산소원자 1개에 수소원자 2개가 전기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진다. 정전기에 머리카락이 달라붙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러나 수소결합은 다른 방식에 비해 서로를 잡아당기는 힘이 약한 편이다. 일반적인 액체보다 더 느슨한 상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얼음이 생기는 비밀은 바로 이 느슨한 구조에 숨어 있다.

온도가 내려가면 물분자의 결합구조가 변하면서 얼음의 상태와 비슷해진다. 그러다 ‘빙정’이라 불리는 조그만 얼음 씨앗이 생겨나면 그 주변의 물분자도 결합구조가 변하면서 얼기 시작한다. 바꿔 말하자면 얼음 씨앗이 생기지 않도록 막는다면 영하의 온도에서도 물이 얼지 않을 수 있다. ‘과냉각수’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과냉각수의 최저온도는 ‘동질 핵형성 온도(homogeneous nucleation temperature)’라 불리는 절대온도 232K 즉 섭씨 영하 41.15도였다. 이보다 온도가 더 내려가면 물의 구조가 급격하게 변하면서 순식간에 얼음으로 변한다.

200배 빠른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조 밝혀내

그러나 미국 유타대 연구진이 쓴 논문에 따르면 이보다 낮은 온도에서도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한다. 다만 얼음으로 변하는 시간이 너무 빨라 현재의 계측장비로는 감지해낼 수 없는 것이다.

발레리아 몰리네로(Valeria Molinero) 화학과 교수와 박사과정생 에밀리 무어(Emily Moore)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물이 얼음으로 ‘반드시 변해야만 하는’ 정확한 온도를 찾아냈다. 화씨로는 영하 55도, 섭씨로는 영하 48.3도다.

연구진은 시뮬레이션을 구축하기 위해 유타대 고성능컴퓨터센터(CHPC)의 힘을 빌어 기존보다 200배 빠른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물분자의 구조를 계산하는 모델을 만들었다. 수소원자와 산소원자가 결합된 물분자가 수소결합에 의해 단일한 입자로 변하는 과정을 단순화시켜 계산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정확한 구조를 알아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물 한 방울보다 적은 양에 불과한 3만2천768개의 물분자를 시뮬레이션해서 열용량, 밀도, 압축도를 계산해내고 4천개의 물분자가 얼음으로 변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에만 수천 시간이 소요됐다.

▲ 온도가 낮아질수록 물분자(흰색)들이 중간얼음(녹색)으로 변하다가 섭씨 영하 48도를 넘기면 얼음(적색)이 된다.  ⓒUniversity of Utah

계산 결과 물의 온도가 섭씨 영하 48도에 가까워질수록 특이한 열역학적 현상이 나타났다. 밀도가 감소할수록 열용량이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했다. 압축도도 늘어났다. 다른 액체와 달리 온도가 낮아질수록 압축하기가 쉬워진다는 의미다.

원인은 사면체(tetrahydron) 구조에 있었다. 초저온 상태에서는 하나의 물분자가 다른 4개의 물분자와 결합해 삼각형 외면이 4개인 사면체 구조가 되는 비율이 높았고 이에 따라 특이현상이 나타났다. 물도 아니고 얼음도 아닌 이러한 상태를 연구진은 ‘중간얼음(intermediate ice)’ 상태라 불렀다.

물이 급속하게 냉각되면 얼음결정이 만들어질 시간이 없어 창유리처럼 무정형 구조로 이루어진 저밀도 얼음이 된다. 그러나 계산 결과 무정형 얼음의 4분의1 정도는 중간얼음이나 작은 얼음결정 상태를 거친다.

연구를 진행한 몰리네로 교수는 “물분자의 구조에 따라 얼음이 만들어지는 비율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라며 “이 비율을 알아낸다면 대기권에 존재하는 물 성분이 얼마나 많은 양의 태양복사열을 흡수할 수 있는지 계산 가능하므로 지구온난화를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의의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