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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장제스에 질린 미군, 늘 한국군 지휘관을 예의주시했는데…


  • 中 장제스에 질린 미군, 늘 한국군 지휘관을 예의주시했는데…

  •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E-mail : q5423q@hanmail.net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생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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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2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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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전우야 잘 자라

한국에 온 미군의 우려

한국 전선에 뛰어들어 우리와 함께 어깨를 잇고 공산주의 군대를 맞아 싸운 미군에게는 좀체 없애기 힘든 큰 상처의 기억이 하나 있다.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군대를 지원했으나, 종국에는 그들이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군에게 중국 전역의 지배권을 넘겨주도록 했던 기억이다.

당시 미국은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군대에 막대한 예산을 지원했다. 무기와 장비는 물론이고, 천문학적인 예산을 지원하면서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국민당 장제스의 군대는 하루아침에 30개 사단이 공산군에게 투항하면서 중국 전역의 지배권을 내주고 말았다.

‘무능과 부패’는 당시 국민당 장제스 군대를 바라보는 미군의 솔직한 시선이었다. 엄청난 돈과 무기를 지원하고서도 허망하게 무너지는 중국인의 군대, 나아가 동양인이 구성하는 군대에 대한 미군 수뇌부의 시선은 싸늘하다 못해 아주 차가웠다. 특히 중국 국민당 군대에 대한 지원을 주도했던 미군의 사실상 최고 전략가 조지 마샬의 태도가 더욱 그랬다.

중국 국민당 군대가 남긴 암울한 그림자는 아직 없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한 1949년으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던 당시의 상황이 그랬다. 미군은 아주 많은 조바심과 우려를 지닌 채 한반도에 올라섰던 것이다.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고 대만으로 패퇴한 장제스가 국민당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고 대만으로 패퇴한 장제스가 국민당 군대를 사열하는 모습.
그들은 우선 김일성의 공산주의 군대를 맞아 싸움을 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눈을 들어 주변의 한국군 지휘관을 살폈다. ‘어느 지휘관이 우리가 믿고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문제 때문이다. 그 때문에 미군은 아주 교묘하다 싶을 정도로 한국군 지휘관을 검증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한국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미군은 군사고문단을 각 한국군 부대의 지휘관에게 보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물론 한국군에 대한 지원이다. 그러나 그 말고도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지원하는 한국군 지휘관이 어떻게 싸우는가를 지켜보는 일이었다. 전략과 전술 분야의 능력, 보급 등 행정체계의 구성과 운용, 사생활을 비롯한 개인적 면모 등이 모두 관찰 대상이었다.

1970년대 초반 미 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사람 중 하나가 존 마이켈리스다. 그는 6·25 당시 다부동에서 우리 1사단과 함께 적을 맞아 싸운 미 25사단 27연대장이었다. 그는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한 뒤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전쟁 중에 한국에 올라온 미군 지휘관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한국군 지휘관 중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워커가 부른 장군 밀번

미군의 역사적 전통은 여럿이지만 가장 뚜렷한 특징 하나가 끊임없는 관측과 개척의 부대라는 점이다. 이는 미국 동부에서 서부를 개척하는 과정, 그 이후로 벌어진 독립전쟁 등을 통해 쌓은 미군의 전통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엄격한 검증을 통해 힘을 축적하고 전개하는 버릇이 있다.

게다가 그들이 접한 중국 국민당에 관한 기억도 머릿속에서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중국의 공산화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발발한 한반도의 전선에 올라서는 미군이 어떤 마음으로 한국군을 보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의 그런 시선에 내가 들었던 셈이다.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다부동이라는 곳에서 우리 1사단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라는 의식 속에서 뭉치고 또 뭉치면서 싸웠다. 그런 모든 과정은 1사단 사령부와 각급 부대에 파견된 미 군사고문을 통해 자세히 알려졌던 듯하다.

우리 1사단 모든 이의 분투를 미군은 아주 높이 샀다. 그로써 신임 미 1군단장으로 부임한 프랭크 밀번은 ‘공세 전환’을 위해 선뜻 국군 1사단을 자신의 예하에 편입시킨 뒤 막강한 미 제10 고사포여단을 우리에게 배속했던 것이다.

밀번은 독일에 주둔하다가 막 한국전선에 부임한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둔하던 독일에서 참모진을 대거 몰고 왔다. 그는 당시 한국 전선을 모두 이끌고 있던 월턴 워커 미 8군 사령관의 호출을 받았다고 한다.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이 기관총을 거치한 채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모습./라이프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이 기관총을 거치한 채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모습./라이프
원래 워커는 자신이 이끌고 있던 미 8군의 콜터(Jon B. Coulter) 부사령관을 미 1군단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워커는 독일에 주둔 중이던 밀번을 불렀다. 워커와 밀번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유럽 전선에서 군단장으로 함께 전쟁을 치른 사이다. 워커는 패튼 장군의 지휘 아래에 있어 밀번과는 소속이 달랐다.

그러나 인접한 유럽의 전선을 누비면서 워커는 밀번의 공격력을 잘 알고 있었다. 미 육사인 웨스트포인트 졸업 연도는 워커가 두 해 앞섰다. 그러나 그런 학연(學緣)보다는 같은 전선에서 상대가 어떤 싸움의 자세를 보였는지가 중요했던 모양이다.

밀번은 별명이 ‘새우’다. 사람들은 늘 밀번을 ‘슈림프 밀번(Shrimp Milburn)’으로 불렀다. 미식축구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그의 키는 미국인 치고는 작은 편에 속했다. 게다가 목이 길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웨스트포인트 재학 시절 미식축구를 할 때는 밀번이 크게 돋보였다고 한다.

작은 키에 다부진 몸집을 한 밀번이 축구 볼을 가슴에 끌어안고 맹렬하게 달려갈 때의 폼이 꼭 ‘새우’의 모습을 닮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칭 비슷하게 그를 항상 ‘슈림프 밀번’이라고 불렀다.

독일 주둔지에서 느닷없는 미 8군 워커 사령관의 부름을 받고 한국전선에 도착한 밀번은 특별한 임무를 받았다. 바로 도쿄에 있는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낙동강 전선에서 전투의 흐름을 바꿔 공세를 벌여야 하는 내용이었다.

인천상륙을 위한 준비

당시 맥아더가 구상했던 인천 상륙작전은 몇가지 조건이 달려 있었다. 인천 앞바다의 심한 조수간만 차를 극복해야 했고, 대량의 병력과 화력을 일거에 뭍으로 올려야 하는 등 여러 난관이 있었다. 그 외에도 반드시 선결(先決)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 머무는 아군의 보병 전력이 북상해 인천으로 상륙하는 미 해병대의 뒤를 받쳐줘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후방에서 인천을 통해 상륙한 해병대 병력의 뒤를 보호해주는 ‘rink-up’ 작전이 펼쳐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전 이래 줄곧 방어에만 주력해 오던 아군의 흐름을 공세로 전환해야 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그 적임자로 밀번 장군을 선택한 것이다. 콜터 미 8군 부사령관도 의중에 있었지만, 기존의 흐름을 과감한 공세로 전환하는 데에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유럽 전선에서 탁월한 공격력을 선보였던 밀번 장군이 적격이라고 봤던 것이다.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맨 왼쪽) 시절의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오른쪽).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맨 왼쪽) 시절의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오른쪽).
미 8군은 공세로 전환하는 길목에서 국군의 조력(助力)이 필요했다. 현지 지형과 모든 상황을 잘 아는 한국군 전투사단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고, 그에 따라 미 8군은 다부동에서 위기를 이겨내는 데 나름대로의 공로를 쌓았던 우리 1사단을 선택했던 셈이다.

대구의 과수원에서 내가 밀번을 만나는 장면은 사실 일종의 ‘면접’과도 같았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뒤 우리 1사단의 전적(戰績)과 그를 이끌고 있는 내 관련 정보를 모두 숙지했던 듯하다. 그는 곧 미 제10 고사포 여단을 내게 보냈다. 고사포 여단을 이끌고 있던 지휘관은 헤닉(William Hennig) 대령이었다. 밀번을 만난 하루 뒤 그가 먼저 우리 1사단 사령부를 찾아왔다. 당시 한국군으로서는 언감생심의 막강한 화력을 이끌고 나타난 그는 표정이 아주 침착해 보였다.

이후 그는 나와 줄곧 전선에서 생사를 함께 하는 동지로 변했다. 당시 그는 내게 아주 기쁜 소식을 건넸다. “포탄 운반 차량도 아주 많이 끌고 왔으니 지원이 필요할 경우 서슴없이 요청해라.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부산을 방어하던 미 10고사포 군단이었다. 막강한 화력으로 우리의 뒤를 받쳐주겠다는 그의 약속은 적을 앞에 두고서도 화력이 변변치 않아 늘 고전해야 했던 우리 1사단에게는 반갑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마침 밀번 장군을 만난 뒤 그로부터 잔뜩 얻어온 미군의 5만분의 1 지도가 곁에 있었다. 정밀한 좌표가 있는 지도였고, 그 좌표에 따라 정밀한 포격을 가할 수 있는 미군 포병 여단도 우리 1사단에게 왔다.

이제 앞으로 적을 뚫고 나가는 일만 남았다. 9월 15일이었다. 인천으로 미 해병이 상륙작전을 벌여 성공을 했다는 낭보가 낙동강 전선에 날아들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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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